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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네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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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테판 네마냐는 1166년 또는 1167년 세르비아의 대공으로 즉위하여 세르비아 부족을 통일하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독립된 세르비아의 대공이 되었다. 그는 1172년 비잔티움 제국에 항복한 후 봉신이 되었지만, 이후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에 대항했다. 1189년 제3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만났으며, 1191년 비잔틴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1196년 은퇴하여 수도사가 되었으며, 아들 성 사바와 함께 세르비아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정교회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세르비아 민족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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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네마냐
기본 정보
스테판 네마냐의 기증자 초상화, [[스투데니차 수도원]]의 성모 교회 프레스코
스테판 네마냐의 기증자 초상화, 스투데니차 수도원의 성모 교회 프레스코
정보
가족 관계
통치
기타 정보

2. 생애

스테판 네마냐는 1113년 또는 1114년경 제타의 리브니차(현재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근처)에서 세르비아 왕족인 자비다의 아들로 태어났다.[1] 1166년 세르비아의 대공으로 즉위한 뒤 세르비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독립된 세르비아의 대공으로 즉위하면서 네마니치 왕조 시대를 열었다.[1]

1196년 고령을 이유로 왕위에서 물러난 뒤 수도원에서 수사로 근무했으며, 이름을 '''시메온'''(Symeon)으로 개명했다.[1] 아들 성 사바와 함께 독립적인 세르비아 교회를 건설하고 동방 정교회를 수호했다.[1] 힐란다르 수도원 건립 등 세르비아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1] 사망 후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몰약이 흐르는 성 시메온'''이라는 칭호의 동방 정교회 성인으로 추대했다.[1]

1168년 형을 살해하고 세르비아 후작으로 즉위, 1171년 독립 군주이자 세르비아 왕 스테판 1세로 즉위하며 네마니치 왕조를 열었다.[1] 그러나 당시 "왕"은 자칭이었고, 국제적으로는 "후작"으로 대우받았다.[1] 이후 불가리아 독립을 지원하는 등 동로마 제국과 대립했으나, 정교회를 보호하기도 했다.[1] 1196년 은퇴 후 수도사가 되었고(시메온으로 개명), 성 사바와 함께 세르비아 교회를 건설하고 힐란다르 수도원을 건립했다.[1]

2. 1. 초기 생애

스테판 네마냐는 1113년 또는 1114년경 제타의 리브니차(현재 몬테네그로 수도인 포드고리차 근처)에서 태어났다.[1] 그는 자비다의 막내아들이었는데, 자비다는 형제들과의 갈등 이후 리브니차로 보내져 영주의 칭호를 받았다.[1] 자비다(벨리 우로시)는 우로시 1세 또는 부칸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1] 서 제타는 로마 가톨릭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네마냐는 라틴 세례를 받았지만,[1] 그의 생애 후반은 서방과 동방 기독교 형태의 균형을 유지하며 보냈다.[1]

2. 2. 비잔티움-헝가리 전쟁 (1163-1167)

1163년,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는 세르디카(소피아)를 거쳐 니시로 군대를 이끌고 왔다. 요안니스 키나모스에 따르면, 황제는 "세르비아와 관련된 문제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세르비아는 헝가리 왕조 분쟁에서 스테판 3세의 동맹이자 마누엘의 반대자인 대주판 데사가 통치하고 있었다. 1165년 데사가 황제 앞에 니시로 오게 되었을 때, 헝가리 왕 스테판 3세와의 관계가 드러났고, 데사가 그를 자신의 주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마누엘 1세는 그를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데사는 처음에는 구금되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법정 감옥으로 보내졌다.[1]

그 땅은 친 비잔틴 파벌에 속한 자비다의 아들들, 즉 티호미르, 스트라치미르, 미로슬라프, 그리고 막내 네마냐에게 주어졌다. 티호미르는 장남이었고 세르비아의 대주판이 되었다. 스트라치미르는 자파드나 모라바 주변 지역을, 미로슬라프는 자후믈레를, 스테판 네마냐는 이바르 구 주변 지역, 토플리카 (oblast)|토플리카|토플리카 (지역)sr와 두보치차(레스코바츠 주변)를 받았다.[1]

코사니차강과 토플리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성모 교회 유적.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헝가리의 불만과 내부 분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대규모 군대를 헝가리를 상대로 출동시켰다. 헝가리 왕자 벨라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거주하며 결혼해야 했고, 벨라의 영토인 달마티아와 남부 헝가리(벨레비트 아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배하에 들어가야 했다. 헝가리에는 저항이 있었고, 이것이 마누엘 황제가 원정을 시작한 이유였다. 비잔틴 군대는 1165년에 제문과 스렘을 정복했다. 요안니스 두카스 콤네노스가 지휘하는 두 번째 비잔틴 군대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거쳐 아드리아해 해안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스플리트에서 바르까지의 모든 도시를 점령하여 비잔틴 지배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1]

현대 쿠르슐루마 근처의 반스카와 토플리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성 니콜라스 수도원.


비잔틴은 이탈리아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아드리아해 서해안의 중요한 항구 도시인 안코나를 점령했다. 베네치아아드리아해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비잔틴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베네치아는 비잔틴에 대항하는 자연스러운 동맹국으로서 헝가리에 접근했다. 동시에 그들은 세르비아인, 특히 세르비아에서 비잔틴에 반항하도록 활동하기 시작했다.[1]

1166년, 헝가리는 비잔틴을 새로 정복한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여 마누엘 황제는 헝가리를 상대로 세 개의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하나는 도나우강에서, 다른 두 개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거쳐 판노니아 평원의 중심으로 진격했다. 주 헝가리 군대가 도나우강,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요새를 향해 작전을 펼치는 동안, 두 개의 비잔틴 군대가 헝가리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전반적인 공황을 야기했다. 헝가리인들은 1167년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중재를 통해 평화를 추구해야 했다.[1]

라스 요새 기슭 절벽에 있는 성 미카엘 대천사 동굴 수도원 교회의 유적.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베네치아와 헝가리의 이상적인 후보로 네마냐가 떠올랐는데, 그의 형제들, 특히 티호미르가 그를 라스 요새 근처의 동굴에 가두었을 때였다. 네마냐는 마누엘 황제가 그의 맏형 티호미르를 왕위에 앉히면서, 친 그리스 파벌의 이전 대표였던 데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때문에 분노한 네마냐는 헝가리와 그 동맹국들을 지지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네마냐는 감옥에서 탈출했는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네마냐의 아들이자 전기 작가인 스테판 네마니치는 그의 아버지의 삶을 묘사하면서, 그가 "천상의 힘"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고 말한다.[1]

2. 3. 권좌에 오르다 (1168-1172)

1166년 또는 1167년에 네마냐는 코토르를 정복하고 라스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비잔틴의 지원을 받던 티호미르에 대항하여 분쟁을 시작했다. 네마냐는 티호미르를 전복시켰고, 1168년 가을에 비잔틴의 조치를 촉발했다.[1]

마누엘 황제는 네마냐의 의도를 시험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테오도르 파디아테스를 파견했다. 토파르크 네마냐는 로마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로 덤벼들어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황제가 추격하자 그는 잠시 전투에 참전했다가 돌로 봉쇄한 산 동굴 속에 숨었다. 그는 마누엘에게 항복하며 잔혹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간청했고, 세르비아의 통치자에서 제거될까 두려워했다.[1]

주변 언덕에 있는 성 조지 교회


1169년, 네마냐는 비잔틴의 봉신인 제타의 라도슬라프 공작을 공격하여 제타와 네레트바 지역의 일부를 합병했다. 1171년 마누엘 1세 코메노스는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분쟁으로 비잔틴 내 베네치아 재산을 몰수했고, 베네치아 해군은 비잔틴의 트로기르두브로브니크를 점령했다. 네마냐는 베네치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비잔틴 코토르를 공격했으며, 베오그라드니시 사이의 도로가 지나는 벨리카 모라바 계곡을 습격했다. 1172년 3월, 라브노 요새 근처에서 세르비아인들은 헨리 사자공이 이끄는 서부 기사단과 순례자들을 야습했다.[2]

헝가리 왕국과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신성 로마 제국도 비잔틴에 대항하는 동맹에 참여하려 했다. 네마냐는 헝가리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1172년 3월 4일 헝가리 국왕 헝가리의 이슈트반 3세가 사망했다.[1] 헝가리 사절들은 세르디카(소피아)에서 마누엘 황제를 만났고, 헝가리 왕위는 마누엘이 지명한 헝가리의 벨라 3세가 차지했다. 1171년/1172년 겨울, 키오스 섬에서 베네치아군은 유행병으로 전멸하여 세르비아는 홀로 남게 되었다. 마누엘은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로 향했고, 네마냐는 산으로 후퇴했다. 비잔틴 역사가 요한 키나모스는 베네치아인들이 네마냐를 선동했다고 기록했다.[3]

1168년, 네마냐는 형을 살해하고 세르비아 후작으로 즉위했다. 이후 세르비아 부족들을 통일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1171년 독립 군주, 세르비아 왕 스테판 1세로 즉위하며 네마니치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왕"은 자칭이었고, 국제적으로는 "후작"으로 대우받았다.

2. 4. 비잔티움의 봉신 (1172-1182)

이 분쟁은 네마냐가 황제 마누엘에게 항복하면서 끝났다. 어느 날, 네마냐는 니시에서 마누엘 1세 코므네누스 황제에게 의례적으로 복종했다. 맨발로, 팔꿈치까지 찢어진 옷을 입고, 목에 밧줄을 두르고, 손에는 칼을 든 채 그는 비잔틴 진영에 들어가 황제에게 나아갔다. 마누엘 앞에 도착한 그는 무릎을 꿇고 칼을 건네며 원하는 대로 하도록 했다. 비잔틴 황제는 그의 겸손함을 받아들여, 봉신 의무를 갱신하는 데 동의하고 네마냐를 대주판 자리에 두었다.[1] 이 사건의 마지막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졌는데, 네마냐는 마누엘의 개선 행렬에서 노예로 끌려갔고, 모인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1] 그는 심지어 "황제가 세르비아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의뢰한 일련의 벽화를 보여주었다. 그의 추정 반응은 테살로니키의 유스타티우스의 연설에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들을 보고, 그는 모든 것에 동의하고 시각적인 향연을 승인한다. 그는 한 가지 측면에서만 화가를 꾸짖는데, 후자가 승리의 모든 장면에서 그를 노예(doulos)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1]

비잔틴 황제 마누엘 코므네누스는 네마냐를 대주판 자리에 복귀시켰고, 그의 형제들에게 그들의 지역, 즉 서 모라바 주변의 스트라치미르와 자흘룸의 미로슬라프를 확인해 주었다. 세르비아로 돌아온 네마냐는 중앙 정부를 통합하는 데 주력했으며, 티호미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르보슬라프가 그의 편을 들어 통치자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봉신 의무에 따라 네마냐는 정기적으로 비잔틴 군사 작전에 보조 부대를 파견했다. 세르비아 부대는 1176년 9월 17일 소아시아의 협곡에서 룸 술탄국의 군대에 패배한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비잔틴 군대에도 포함되었다.

2. 5. 비잔티움과의 전쟁 (1183-1191)

Стефан Немањаsr는 1183년부터 1191년까지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1180년 마누엘 1세 황제가 사망하자, 헝가리 국왕 벨라 3세는 더 이상 비잔티움에 대한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고 1181년 비잔티움을 공격하여 스렘, 아드리아 해 북동부 해안 (자다르 포함) 및 제문을 정복했다. 비잔티움은 내부 분쟁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1]

1180년 마누엘 1세 황제 사망 당시의 비잔틴 제국


1182년 4월,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는 마누엘 1세의 미망인이자 라틴 공주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전복시키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이 사건은 곧 라틴인 학살로 이어졌다.[1]

안드로니코스 1세의 찬탈은 네마냐를 비잔틴 황제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게 했다. 스테판 네마냐는 헝가리 국왕 벨라 3세와 동맹을 맺고 1183년 비잔티움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비잔틴 군대의 지휘관 안드로니쿠스 람파르디스는 니시와 브라니체보에서 새로운 중앙 정부에 대한 복종을 거부했다. 헝가리 국왕 벨라 3세는 비잔틴 베오그라드, 니시세르디카(소피아)를 정복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네마냐가 이끄는 세르비아인들이 이 작전에 참여했다. 이듬해, 네마냐는 아드리아 해 동남부 해안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여 비잔틴 슈코더르를 정복하고 두브로브니크(라구사)를 포위했다.[1]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살해되었고, 새로운 비잔틴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는 헝가리 국왕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헝가리 군대는 발칸 비잔틴 중앙부에서 철수했고, 네마냐는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네마냐는 노르만족 및 불가리아인과의 반비잔틴 동맹을 통해 계속 전쟁을 이어갔다.[1]

네마냐는 두브로브니크(라구사)가 비잔티움을 대신하여 노르만 통치를 따르도록 강요했다. 1185년 시칠리아의 국왕 윌리엄 2세의 노르만족은 디라키움테살로니카를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플 원정에 착수했지만, 데메트리체스 전투에서 비잔틴에게 패배했다. 1185년 10월, 하부 도나우의 북부 불가리아에서 표트르와 이반 아센 1세가 이끄는 봉기가 시작되었고, 네마냐는 이후 아센 형제와 비잔티움에 대항하는 행동을 조율했다. 1186년 9월, 네마냐와 그의 형제들은 윌리엄 2세가 통치하는 "두브로브니크 시와 평화를 맺었다".[1]

2. 6. 두 황제 사이에서 (1189-1191)

코스타 만드로비치 작품, 스테판 네마냐와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1189년 만남


1187년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흐 앗딘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십자군은 1189년 부다에서 베오그라드, 니시를 거쳐 아드리아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니시 인근 성 삼위일체 교회. 11세기 후반 바실 2세 치세 비잔틴 제국 부흥기에 지어진 비잔틴 지방 교회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1189년 7월 말, 스테판 네마냐는 자신의 수도인 니시에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를 만났다. 네마냐는 비잔틴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 전쟁을 돕는 대가로, 세르비아가 최근 정복한 영토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2] 그러나 바르바로사는 십자군의 안전한 비잔틴 통과를 위해 외교적으로 거절했다. 그의 주 목표는 예루살렘 해방이었다.[2]

이후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 간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양측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당시 기독교 세계에는 단 한 명의 황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교리에 따라,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는 경쟁과 갈등이 있었다. 십자군은 필리포폴리스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준비했다. 네마냐는 이 틈을 타 비잔틴 제국의 스코페를 공격했다. 1190년 2월, 아드리아노플에서 두 황제는 십자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는 것을 허용하는 합의에 도달했다.

1190년 6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살레프 강에서 익사했다. 이사이오스 2세 앙겔로스는 세르비아에 대한 징벌 원정을 시작했고, 1191년 남부 모라바 전투에서 네마냐는 패배했다. 비잔틴 제국은 세르비아를 완전히 복속시키는 대신, 니시베오그라드로 가는 주요 도로를 되찾고 반란 세르비아인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1193년 평화 조약에 따라, 스테판 네마냐의 둘째 아들 스테판 네마니치는 비잔틴 황제의 조카인 유도키아 안젤리나와 결혼했다.

3. 비잔티움으로 돌아오다

체결된 평화 조약에 따라 네마냐의 뒤를 이어 차남 스테판이 세르비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스테판은 세바스토크라토르라는 비잔티움 제국의 칭호를 받았고, 비잔티움 황녀 에우도키아와 혼인하였다. 장남 부칸 대신 스테판이 후계자가 된 것이다.[3]

1196년, 라스의 성 베드로와 바울 사도 교회 인근에서 열린 국가 회의에서 스테판 네마냐는 왕위를 차남 스테판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맏아들 부칸에게는 제타, 트라부니야, 흐보스노, 토플리차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네마냐는 노년에 수도사가 되어 시메온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비잔티움으로 가서 막내 아들 사바가 수도사로 있던 아토스 산으로 갔다. 그들은 비잔티움 황제의 허가를 받아 힐란다르의 버려진 수도원을 재건하였다.

4. 죽음과 유산

스테판 네마냐는 86세의 나이로 죽음을 앞두고, 호데게트리아 성모자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들 사바와 다른 수도자들 앞에서 1199년 2월 13일에 사망했다.[1] 그는 힐란다르 수도원 경내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사바에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신이 허락하시면" 그의 유해를 세르비아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1] 사바는 후에 네마냐를 기리는 ''성 시메온 예식서''를 저술했다.[1]

1206년, 사바는 아버지의 유해를 세르비아로 가져가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그의 형제 스테판과 부칸은 서로 싸우며 아버지가 통일한 세르비아 땅을 분열시키고 있었다.[2] 사바가 도착하자 형제들은 화해했고, 시메온은 1207년에 그의 개인 재단인 스투데니차 수도원에 재매장되었다.[2] 그의 새 무덤에서 성유 (몰약)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시메온은 '향유를 흘리는'이라는 칭호를 얻었다.[2]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나자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그의 축일을 선포했다.[2] 성 시메온 숭배는 세르비아 민족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3] 그의 숭배 중심지는 스투데니차와 힐란다르 수도원에 있다.[3]

''향유를 흘리는 성 시메온'' (1899) by 우로스 프레디치

5. 가족

스테판 네마냐는 세르비아 귀족 여성 안나와 결혼했다. 슬하에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2]

이름설명
부칸 네마니치도클레아 공작, 잠시 세르비아 대공 (1202–1204)
스테판 네마니치네마냐의 후계자, 초대 "모든 세르비아 땅의 왕", 1196–1228
라스트코 네마니치 (성 사바)(1171–1236) - 세르비아 정교회의 초대 대주교이자 성인
예피미야 네마니치마누엘 콤네노스 두카스 테살로니키 섭정과 결혼
이름 미상불가리아 귀족 티호미르 아센과 결혼, 불가리아 황제 콘스탄틴 티흐 (재위 1257–1277)의 어머니
옐레나-예브게니야, 이반 아센 1세의 아내


참조

[1] 간행물 The Cave Lavra of the Archangel Michael in Ras https://www.academia[...] 1999
[2] 문서 HISTORIA DE EXPEDITIONE
[3] 간행물 On the attack of the Hungarian king Bela III on Serbia in light of the letter of Emperor Isaac II to Pope Celestine III https://www.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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